“칼레의 시민”
4.15국회의원선거가
부정선거라는 의혹이 끊임없다.
민주주의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부정선거라는데?
민주투사라며?
말만하면 “민주”를 울부짖는데
여당, 야당, 언론, 법조계 모두
몸을 도사리고 있는 듯하다.
부정선거라는 의혹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당선자들 중에 누구 한 사람이라도
무효를 선언하고 다시하자고 나서야 할 것 아닌가.
야당 당선자들은 모두 사퇴를 선언하는 일은
술좌석에서나 하는 말인가.
현재 우리나라에서
“민주투사”가 아닌 정치인이 있는가?
4.19정신이 무색하다.
<칼레 시민> 이야기가 떠오른다.
프랑스 북부 도시 칼레는
1347년 백년전쟁 당시 영국군에 포위되었다.
1년 가까이 영국의 공격에 저항했지만
더 이상 먹을 것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승리를 거두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말했다.
“칼레의 시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겠다!”
칼레 시는 영국 왕에게 사절을 보내
여러 번에 걸쳐 살려달라고 간청을 했다.
“좋다. 그러면 시민들의 목숨은 보장 하마.
그러기 위해서는 그동안 영국군을 애먹인 대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영국 왕은 시민 대표 6명을 뽑아 보내면
그들을 시민 전체를 대신하여 처형하겠으며,
대신 다른 시민들은 살려주겠다며 조건을 내걸었다.
시민들은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다.
6명이 그들을 대신해 죽어야 한다니..
누군가는 나서야 했지만,
아무도 목숨을 버리려 들지 않았다.
그때 칼레에서 가장 부자였던
위스타슈 생 피에르가 죽음을 자처했다.
“칼레의 시민들이여, 나오라. 용기를 가지고.”
그러자 시장도 나섰다.
상인도 나섰고, 그의 아들도 나섰다.
죽음을 자처한 사람이 모두 일곱 명이 되었다.
죽음에서 한 사람은 빠져도 되었지요.
제비를 뽑자는 말도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생 피에르는 다음과 같이 제의했습니다.
“내일 아침 장터에 제일 늦게 나오는
사람을 빼는 건 어떻습니까?”
모두 이 말에 동의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여섯 명이 모였다.
생 피에르가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궁금했다.
모두 안 나와도 그는 나올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죽음을 자원한 사람들의 용기가 약해지지 않도록
칼레의 명예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이들이 처형되려던 마지막 순간,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왕비의 간청을 듣고
그 용감한 시민 6명을 살려주었다.
목숨을 건 용기가 적의 수장까지 감복시킨 것이다.
그로부터 550년이 지난 1895년 칼레 시는
이들의 용기와 헌신을 기리기 위해
프랑스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에게 의뢰했는데
이 작품이 <칼레의 시민>입니다.
<인터넷에서>
역사는 용감하고 정의로운
소수의 영웅으로 인해 순방향으로 흘러간다.
우리나라에서 곧 이런 영웅이 탄생할 것이다.